엄흥도는 누구? 단종 시신을 거둔 영월 호장 이야기
1457년 영월에서 숨진 단종의 시신을 모두가 외면할 때, 고을 호장 엄흥도가 몰래 장사를 지냈다. 단종은 241년 뒤 왕으로 복위됐고 그도 충신으로 기려졌다.
- 누구? 조선 세조 때 강원도 영월 고을의 호장(지방 관아 실무를 맡은 향리의 우두머리)
- 한 일: 유배지에서 숨진 단종의 시신을 아무도 수습하지 못할 때 홀로 거둬 장사를 지냈다
- 왜 중요? 단종의 무덤 장릉이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건 이 한 사람의 선택 덕분이다
1457년 영월,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
- 숙부 수양대군(세조)에게 왕위를 내준 단종은 복위 계획이 드러나면서 노산군으로 강등돼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다
- 삼면이 강, 한 면이 절벽이라 배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. 큰 홍수로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거처를 영월 관풍헌으로 옮겼다
- 1457년 10월, 단종은 17세로 영월에서 생을 마쳤다. 뒤탈을 걱정한 사람들은 시신에 손을 대지 못했다
“옳은 일로 화를 입어도 달게 받겠다”
- 주변에서 말렸지만 엄흥도는 “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해도 달게 받겠다(爲善被禍吾所甘心)“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
- 그는 시신을 거둬 영월 엄씨 집안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남몰래 묻었다
- 청령포 유배 시절에도 밤이면 몰래 찾아가 단종에게 문안을 드렸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한다
241년 뒤에 돌아온 이름
- 조정은 1681년(숙종 7년)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높였고, 1698년(숙종 24년) 왕으로 복위시켜 무덤 이름을 장릉이라 했다.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41년 만이다
- 엄흥도도 충신으로 기려졌다. 그의 정려각은 1726년 청주에 처음 세워진 뒤 1759년 영월로, 1970년 장릉 입구 재실 옆으로 옮겨졌다
- 1791년(정조 15년)에는 장릉에 배식단을 쌓았다. 정단에 안평대군 등 32명, 별단에 236명을 모셔 단종 곁을 지킨 종친·충신·환관·궁녀의 제사를 함께 지낸다
지금 장릉에 가면
- 조선 왕릉은 한양에서 100리 안에 두는 것이 관례였지만 장릉은 예외다. 유배지에서 숨진 왕이기 때문이다
- 정려비·기적비 같은 비석과 정자가 있는 조선 왕릉도 이곳뿐이다
- 2009년 조선 왕릉 40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
한 줄 평모두가 몸을 사릴 때 한 사람이 움직였다. 장릉 입구의 정려각이 지금도 그 선택을 기억하고 있다.
- : 출처 목록에서 영월군 문화관광 페이지를 뺐습니다(외부 수집을 허용하지 않는 페이지). 글의 사실은 국가유산청 자료로 모두 확인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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